이철환 님 | <연탄길> 저자
이른 새벽, 곤한 잠에서 깬 분홍이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다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얼굴 전체를 덮고도 남을 만한 까맣고 둥그런 물안경을 집어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분홍이는 곧 장독대 옆에 놓여 있던 소쿠리 하나를 챙긴 뒤 조심스럽게 사립문을 열고 마을 앞 샛강으로 향했다. 며칠 전 큰비가 와서인지 마을 앞 샛강엔 평소보다 많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웃 마을 다슬기 방죽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는 흐릿하게나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다슬기 방죽에는 진녹색의 다슬기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뜩이나 푸른 물이 더욱더 푸르게 보였고 만지면 금방이라도 손끝에 푸른 물이 들 것만 같았다. 분홍이는 우선 입고 있던 바지를 한껏 올려붙였다. 그리고 가져온 낡은 물안경을 얼굴 전체에 덮어쓰고 허벅지까지 차는 물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분홍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 속에 깔려 있던 다슬기들을 잡기 시작했다.
다슬기들이 한 주먹 모아지자 “푸!”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들어 올리고는 잡은 다슬기들을 소쿠리에 담았다. 워낙 다슬기가 많아서인지 소쿠리 하나를 채우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분홍이는 기대 이상의 성과에 만족한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안고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음매’ 하는 송아지의 앳된 울음소리가 철구네 집 쪽에서 들려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집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분홍이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직 개어 놓지 않은 자신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 일찍 일어났던 탓인지 눈꺼풀이 저절로 무겁게 내려왔다. 안방에서 엄마의 쓸쓸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 나왔다.
“오늘은 물이 좀 빠졌을 테니 요 앞 물가에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가난을 평생 등에 지고 살아온 엄마의 지친 목소리였다.
“내가 어서 일어나야 할 텐데…, 무릎도 시원치 않은 사람을 이렇게 고생만 시키고 있으니…, 쯧쯧.”
아빠의 서글프고 푸념 어린 목소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잦은 기침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들려왔다. 잠시 뒤 안방 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엄마가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쯤 강 쪽으로 펼쳐져 있는 올망졸망한 논배미들을 가로질러 애기바위 쪽으로 향하고 있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분홍이의 마음은 왠지 편치 않았다. 아빠가 병을 얻은 뒤부터 엄마의 얼굴에 부쩍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분홍이는 다슬기를 잡아 살림을 꾸려 나가는 엄마를 돕고 싶었지만 위험하다는 이유로 어린 딸이 다슬기 잡는 일만은 한사코 말리던 엄마였다. 무릎 관절이 아파 한쪽 다리는 제대로 구부리지도 못한 채 폭 꺼진 두 눈으로 힘들게 다슬기를 잡는 엄마를 보면 분홍이는 늘 가슴이 아팠다.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분홍이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지금쯤 마을 앞 샛강에 깔려 있는 수많은 다슬기들을 잡으며 한없이 기뻐할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다슬기들은 다름 아닌 이른 새벽 분홍이가 이웃 마을 다슬기 방죽에서 잡아다 엄마가 늘 가는 애기바위 근처에 몰래 뿌려 놓은 것들이었다. ‘내일도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분홍이는 문득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뭉클한 어떤 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놓지 말아야 할 희망이라 부르는 설레임이었다. 햇살이 스며드는 창문 밖으로 따뜻한 초록 바람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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